[시편 129:1-8]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2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3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7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8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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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이 항상 있지만 그들은 결국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악인이 심히 핍박할 수는 있으나 의인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수하시며 베인 풀과 같이 악인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묵상&적용: 삶의 깊은 고난을 통해 광야를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고난을 통해 더 그 분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그것이 복이된다. 이스라엘은 누구보다도 심한 박해와 모진 고난의 긴 민족적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들에게 그리도 심한 핍박과 박해가 있었지만 결국 그 악들이 그들을 없애고 파멸할 수 없었다. 그들을 괴롭히는 세력들은 풀과 같이 시간이 지나면 뿌리채 뽑히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옥한 땅에 농부의 수고로 심겨진 귀한 묘목들은 정성다해 가꾸어지는데 그 땅에 적응되고 뿌리 내리기까지 동물들과 각종 병충해의 공격과 방해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결국 부자런하고 슬기로운 농부의 손 길에 보호되고 길리워서 마침내 놀랍게 결실하게 된다. 그러나 잡풀들은 농부의 눈에 띄는 순간 뽑혀지고 말며 그 후 겉은 살아있어 보이나 몇 시간이 채 안되서 불면 나아갈만큼 시들해져 죽고만다. 악인의 최후이며 괴롭힘의 한게이다. 또 어떤 이들은 어질 적부터 건강하지 못하고 약하며 혹은 외형적 결함으로 살아야하고 부모나 민족, 인종,나라를 선택하고 태어나지 못하기에 자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인생의 출발부터 사회속에서 결핍과 매 번 고초를 겪으며 자라야하는 인생도 있다. 그러나 더 연약한 신체의 일부가 본능적으로 더 귀중하게 보호되듯 전능자의 손에 붙들린다면 그 결핍을 먹고 누구보다 더 큰 아름드리 나무로 멋지게 강하게 자라나게 될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척박한 환경과 감당키 어려운 열악한 고난의 삶을 마냥 탓하며 낙심하지말고 허락하신 분의 큰 뜻에 맡기고 의지하며 말씀을 따라 충성을 다하고 살아가야 하겠다. 보이지 않는 그 분의 손이 그 분을 의지했던 아브라함처럼 요셉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결국 예수님처럼..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 긍휼과 이해의 폭이 넓은 도량있는 사람, 믿음의 계보를 이은 이방여인 룻과 같이 출신과 배경을 뛰어넘는 축복의 사람,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으로 빚어가실 것이다. 어떤 형편에도 소망을 주님께 두고 성령을 의지하여 오늘도 힘차게 하루를 살아가야겠다. 기도: 주님, 오직 주님때문에 소망의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한국 민족적인 아픔이 있던 오늘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한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이제 악한 우상숭배하는 세력을 꺾어주시고 고통당하는 땅의 신음을 들으사 억압된 자들을 풀어주시고 고쳐주시며 다시 살아나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진리로 구원과 회복을 허락하시는 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편 129편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쓰여진 시입니다. 시편을 묵상할 때는 시편의 저자가 처한 정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끼는 것과 과거 히스토리를 아는 것과 시적 감수성도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 있을 때부터 노예로 고통 받았습니다. 그 이후 출애굽하여 광야에서부터 여러 민족들과 나라들에게 방해와 괴롭힘을 당하였습니다. 1절의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는 시적 표현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들을 말하며 '나'는 이스라엘 민족 자신을 의미하고 '어릴 때부터'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드디어 민족으로 출발했을 때인 광야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으로 주변의 여러 이방 민족들과 나라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적도 있고 진 적도 있는데 시편의 기자는 2절에 이기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선포는 무슨 뜻일까요? 정말 한 번도 이스라엘은 져 본 적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3절은 이방민족으로부터 받은 괴롭힘과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의 등에 쟁기로 고랑을 만든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바벨론 포로기의 괴로움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게 망하여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이기지 못하였다는 것'은 절망적인 현실을 넘어서 결국에 승리하게 하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망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결국 공의가 승리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 분의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는 바로 공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 이란 표현을 썼는데 시온은 예루살렘이 있는 산입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방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당장은 힘이 있어 이긴 것 같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다음에 시편 기자는 재미있는 시적표현을 씁니다. 그들은 '지붕 위의 풀'과 같다고 말합니다. 지붕 위에 난 풀을 본 적이 있습니까? 지난 목회협력위원회에서 잠깐 나눈 안건 중에 하나가 교회 교육관과 본당 지붕에 풀이 나서 이 풀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지붕에 풀들이 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풀들은 계속 자랄 수는 없습니다.당연히 열매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발견되어 아무 쓸모없이 베이고 잘려져 버려질 것입니다. 이 내용의 표현이 6~8절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우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내가 처한 현실에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시편의 말씀이 놀라운 것은 이제는 더 이상 현실에 직면하여 믿음으로 살아갈 의욕과 힘도 없다고 느껴질 때 다시 일어나게 하는 생기를 우리 마음에 불어넣어주기 때문입니다.
129편의 시편의 저자는 나라를 완전히 잃었음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 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이길 것이라고 소망합니다. 그 이유는 신실하신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예수님 안에 있다면 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처절하게 지고 실패한 것 같지만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 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 후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영광 다음은 심판이 있고, 심판 후에는 영원한 복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자는 여기까지 봐야 합니다.
지금 십자가가 있다고 십자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영원한 복락까지 확실할 때 어두운 현실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소망으로 기대합니다.
오늘 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할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공의로우신 분이란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 오늘 하루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신실한 주님의 사람이 되도록 믿음과 소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