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7:1-9]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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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해: 바벨론 강가에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기억하며 운다. 바벨론이 잡혀온 그들에게 자신들의 기쁨을 위해 수금타며 노래를 불러보라 하여 그들은 애통하고 거절한다. 그들의 고통을 하나님께토로하며 잔악한 바벨론을 벌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묵상&적용: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마음을 담아내는 자연스러운 인격의 표출이라 생각한다.순진한 아이들이나 농부들은 기쁠 때 자연스럽게 흥이나서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른다. 가장 쉽게는 사랑하고 있다면 그 대상을 향해 노래하게 된다. 세러나데처럼.. 더우기 찬양은 그렇기에 재능으로 부른다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이며 우러나오는 신앙의 고백이라고 생각된다. 바벨론이라는 원수 앞에 자신들의 수금으로 그들을 즐겁게할 요량으로 하나님께 드리던 찬양을 노래해야 한다는 요구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였을 것이다. 잔혹한 그들에게 강요받는 노래 부르기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였을 것이다. 적은 인원이지만 성가대가 모여서 마음으로 부르던 찬송이 그리워진다. 소그룹 커피브레이크에서 함께 부르던 찬송가 몇 구절들이,금요찬양예배와 주일예배에 성도들과 소리높여 자유롭게 주님께 부르던 찬송시간들이 많이 그립다. 그런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ㅜㅜ 교회를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던 교인들은 지금 대부분 많이 힘들고 더 지칠 것 같다. 함께 교회에서 예배하고 소그룹하던 시간들을 홀로 견뎌야하고 어두운 뉴스로 점찰된 흉흉한 세상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영혼의 갈함을 많이 느낄 때이다. 벌써 세 달이 지나가고 있다...이번 주부터 온라인뿐 아니라 본당예배를 오픈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아직 오시지 못한다는 것이 많이 안타깝다. 모여도 찬양대도 하지 못하고 식사도 안되며 예배에 마스크에 갇힌 얼굴로 드려져야할 찬양과 기도의 시간들이...맘이 아프다. 하지만 ...영혼의 갈함만큼 우리의 믿음의 간절함은 더 확대되고 증폭되어 영혼이 주님을 향하게 되고 감격하게 되리라 믿고 기대한다. 자유가 없이 바벨론 강변에서 그저 눈물로 독백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을 그들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 같다. 고통을 통해 더 깊은 통찰을 얻고 그 결핍을 통해 진리를 배우는 시간들이 되길 소망한다. 그저 주님께 간구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고 믿음으로 이 터널을 무사히 지나가길 기도한다. 기도: 주님, 홀로 찬양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 드리는 찬양을 세상의 대상과 결코 나누지 않겠습니다. 오직 나의 경배와 찬양의 대상은 주 예수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맑은 가락의 찬양으로 진정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얼굴을 뵈옵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이 시편은 이스라엘(남방 유다)을 멸망시킨 바벨론과 옆에서 도운 에돔 족속을 향한 저주와 심판의 노래입니다. 시편 기자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애처로이 울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기억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노래합니다. 아마 이 시편기자는 분명 예루살렘 성전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찬양하였던 전문 찬양사역자인 것 같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전혀 노래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자신을 잡아온 바벨론 사람들이 자신에게 수금을 타면서 기뻐하며 파괴된 성전에서 찬양한 노래를 한 곡조 부르라고 명합니다. 4절에 눈물을 흘리면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어쩔 수 없이 부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이방 땅에서 노래하지만 절대로 예루살렘을 더더욱 잊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면서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던 때를 떠올리며 에돔과 바벨론의 심판과 저주를 노래합니다. 먼저는 예루살렘이 망하라고 사주하였던 에돔을 심판하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을 파괴한 바벨론이 멸망을 기대하며 그 땅을 저주합니다. 9절은 끔찍합니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실은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고민하게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기도와 노래가 하나님의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이 한 맺힌 탄원의 시를 묵상하면서 분명한 것은 바벨론과 에돔이 얼마나 잔인하고 교활하고 철저하게 유다 백성들과 자녀세대를 파괴하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이 시편을 통해 가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고통에 나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깊이 체휼하시는 분이시란 사실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느끼고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이 세상의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다 아시는 체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통은 나만 당하고 나만 알거야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이해하고 해결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무거운 모든 짐과 고통을 주님께 다 아뢰는 믿음이 있길 바랍니다. - 나는 어떤 깊은 상처와 쓴뿌리를 갖고 있습니까? 이런 인생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나아가 해결해 본 적이 있습니까? - 내 안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분노와 미움이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랑의 주님, 내 삶의 소망은 오직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